'가지불꽃'이란 필명을 쓰는 그 사람 친구 지현, 가정대였던걸로 기억하는데 문학의 꿈이 있었어. 어느날 '가지불꽃展'이란 시화전을 한다고 그 사람이 구경을 가자네. 준공한지 얼마 안된 큰 빌딩(섬유회관 이던가?) 높은 층에서 한다고, 팜플렛 분위기에서부터 약간 기가 죽을 정도였지. 중고교 시절, 여학교에 구경다니던 시화전의 기억이 초라해지더군. 그래도 그렇지, 정식 등단한 문인도 아니고 그냥 여대생의 습작정돈데, 아무튼 대단한 아버지의 전형적인 엄친녀답게 전시장 입구에 장승처럼 줄줄이 버티고 서 있던 화환들. 작가의 설명을 들으면서.. 조용한 음악아래 다과도 들면서, 빵빵한 엄친녀들 속에 섞여서 어색한 저녁시간을 보냈다. 진땀이 나는 건 휘황한 조명때문은 아니었네, 어쩔수 없이 하숙생티가 나는 어설픈 정장이 그렇게 불편할 수가. 그래도.. 전시 첫 날, 채 갖춰지지 않은 음악적 분위기에 몇가지 어드바이스해주고 면피했던 기억이..
우리 과에는 밴드가 없어 어쩌다 '피닉스'란 문리대밴드에 섞이게 됐었다. 예전엔 '감초들'이라고 과밴드가 있었다더만, 공부에 지장있다고 교수진이 없애라고 했다나 어쨌다나. 남부정류장 근처 가정집 지하를 빌려 연습하곤 했는데, 음악적 기호나 정서가 전혀 맞지 않는 친구들이었지만 그냥 기타치는게 좋았어. 주로 과행사에 불려(?)가는게 주무대인 그 당시, 10만원 정도를 받았는데 삼륜차에 용달비, 악기대여비.. 등등 빼면, 음식 대접받는게 남는 거였지. 가장 큰 스트레스는 이런저런 시험이 수시로 있는 과 특성상, 연습시간에 꼬박꼬박 갈 수도 없고 내일 시험인데 오늘 연주를 해야하는 일도 있다는거. 본행사 진행하는 동안 무대 악기 뒤 병풍 안쪽에 쪼그려 앉아 다음날 시험칠 책을 뒤적거리곤 했다. 캠퍼스랑 시내 곳곳에 붙어있는 공연포스터를 봤는지 그 사람이 한번은 걱정스레 얘기했네, 그만하라고. 근데 그만두지 않아도 됐어, 내가 잘렸으니까. 도저히 연습에 참여할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지. 그래도 멋진 시간이었어, 상처뿐인 외도였지만. 방학 후 연습실에 갔더니 내 기타는 팔아먹었더군, 첫 장학금받아 샀던 애마였는데. 그리고.. 그 학기에, 한 과목 과락했어.
몇몇이 어울려 연못에 다녀오는 길에 불쑥, 그 사람이 하숙방에 들르게 됐어. 단짝이랑 셋이 들렀는데 이런 낭패가.. 남정네 하숙방의 꼬락서니야 뻔한 그림이라, 이건 뭐 청소할 여유도 없고.. 그것도 첫 방문인데, 담배를 안피우는터라 그나마 다행이다. 대접할 거라곤 분말차와 음악들. 사실 내게 있어 최고의 대접은 '특별한' 음악들이지만 그건 나 혼자 생각이고. 몇 십분간 좌불안석 손님맞이가 끝나고 여전사들이 일어서는데, 방문을 나서면서 그녀가 한마디 한다.. '저 여자, 좋아하나 봐요..?' 방문에 큼직하게 붙어있던 브로마이드, <Physical> 로 날리고 있던 Olivia Newton John 그 날 이후.. ONJ 는 서랍 속으로.
흐린 날.. 강의실이 무겁다.. 매듭 아이, 그 녀석이 몹쓸 짓을 했단다. 하늘로 간 매듭.. 모질기도 하다. 자식.. 실~컷 울고 다 털어버리지, 그깟 슬픔을 못 이겨서 지 삶을 스스로 매듭지을까.. 사랑이 배신했다고 자기 스스로를 배신할 수가.. 이제.. 나한테 빌려간 책은 어떻게 줄래.. 책상 앞에 걸려있는 매듭은 어떡할까.. 매듭에 달려있는 금속처럼.. 내 마음이 싸늘하다..
매듭 아이.. 어느날 팜플렛을 한 장 건넨다. 과써클외에 교내합창써클에도 다녔던 그 아이, 정기발표회를 한다며 초대를 했어. '올거죠?' 라고 건넸지만 그 녀석도 꼭 오기를 바라는 것 같지 않았고 문제는 공연장소가 대명동캠퍼스 강당인지라 압량벌에서의 나들이가 내키지가 않았지. 저녁을 먹고 왠지 편치않은 기분..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불쑥 하숙방을 나섰다. 낡은 군복상의에 슬리퍼 차림으로 버스에 올라 산넘고 물건너 대명동 캠퍼스로, 왠지 그땐 그냥 가서 봐주고 싶었어. 작은 꽃다발을 사들고 공연이 한참일 즈음에 도착, 맨 뒷자리에 앉아 멀리 무대 속의 그 녀석을 본다. 한참 후 공연은 끝나고, 관객(교내친구들이겠지만)이 우르르 무대로 올라가 꽃다발을 전하고 난리들이다. 객석이 비도록 그냥 한참을 보고만 있었어. 이윽고 단원들끼리 무대에서 화이팅, 하이파이브로 마무리를 하는데. 문득, 그 녀석이 객석쪽을 돌아보다 나를 봤어. 나는.. 영화는 영화일 뿐인줄 알았네. 그 녀석이 무대에서 뛰어내려 바람처럼 내게로 달려온다. 그리고 덜썩 껴안으며.. '왔네요, 선배?' 짧은 인사, 꽃다발을 전하고 뒷풀이 가는 그 녀석과 헤어지고. 털레털레 하숙방으로 돌아오며 적당히 멍한 마음.. 녀석이 필요한 건 사랑이었어..
학과 내에도 몇 개의 써클이 있었다.. 써클의 1년 후배 아이였는데, 그녀와도 친하고 나한테도 호의적이었던 예쁘고 발랄한 아이였어.. 가끔씩 불쑥 팔장을 끼면서 '선배, 빵사줘요~' 하기도 하고 그녀랑 만날 때도 함께 어울리곤 했지.. 어느날, 강의가 끝나고 나설 무렵 벤치에서 선물이라며 툭 내민다.. 매듭.. 마패가 달려있는 짙은 갈색의 매듭.. 별 뜻없이 그냥 만든 거라며 손 흔들고 간다.. 요즘 자주 어울리기는 하면서도 왠지, 어두운 구석이 보이곤 했는데.. 들리는 얘기로 남자친구와 헤어져 무척 힘들어 한다던데.. 어떤 의미일까, 무엇을 매듭짓는단 말일까.. 그걸 본 그녀도 별 얘기가 없다, 침묵이라는 매듭..
겨울방학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남들보다 조금 더 버티다 집에 와서는 개강때도 며칠 일찍 하숙방으로 돌아갔어, 하루라도 빨리 재회하기 위해. 분명히 오기 전, 연탄불 좀 넣어달라고 하숙집아저씨에게 전화로 신신당부했건만 영감님이 천연덕스럽게 '어, 까먹었네~'.. 한겨울 먼지 속 하숙방은 또 다른 감옥. 시골하숙집이 구멍가게를 겸하고 있는게 이럴땐 구원이다. 술은 싫어하지만 고량주를 한 병 샀어. 옆 방 녀석이랑 몇 잔을 나눠마시고, 연탄이 필 때까지 이불 속에서 버틸 수 밖에. 오래지 않아 고량주 특유의 지옥불을 경험한다. 온 몸을 휘감아 오르는 불기둥, 그 취기를 느끼며 아련히 라디오에서 세레나데를 들었지. 문득 스쳐가는 단어, 노숙자.. 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