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귀가시간이 조금씩 늦어졌어. 함께 지내는 시간이 그만큼 길어진거지. 아무래도, 밤의 느낌이 더욱 따뜻한거 같아. 가끔씩 팔짱도 끼게 되고.. 그러고보면, 어깨가 닿거나 손을 잡는 일도 별로 없었던 거 같애, 둘은. 적당히 진지하게.. 조심스럽게.. 그냥 맘으로만 애절하게.. 그렇게 키운 마음. 특히, 버스정류장에서 그 사람의 집 앞까지. 어두운 골목길을 손잡고 걸어가는 순간은, 가로등 불빛만큼이나 너무 따뜻하다. 밤이 되면 왠지 자꾸 이름을 부르게 된다.
전쟁기념관에서도 국군의 날 시가행진에서도, 탱크를 가까이서 본 적이 없는데 어쩌다 캠퍼스 정문 앞에서 탱크를 구경하게 됐다. 빛고을이 붉게 물든 그 때, 휴교령이 내려 광활한 캠퍼스가 군부대의 멋진(?) 야영지가 됐어. 정문 양쪽을 두 대의 탱크가 근엄하게 버틴채, 날카로운 기관포가 앞을 주시하고 베레모들이 마네킨처럼. 특별히 경계나 울타리가 없는 캠퍼스라 하숙집 쪽의 본관으로 어떻게 다녀볼까 했더니 군데군데 야영하는 베레모들이 포진하고 있는거야. 심지어 학적과 교직원도 그 땡볕에 정문 앞에 천막을 친 채 업무를 보고 있으니.. 조폐공사.. 연꽃못을 지나 먼 길을 빙 둘러서 75번 종점까지, 그 사람을 만나러 나가는 길은 행군.. 그 자체였어.
장兄 하숙집.. 여관방에 모였다, 기말시험 준비를 모여서 함께 하자면서. 요즘이야, 학생들을 위한 완벽한 시설의 모텔들이 자연스런 학습공간이 되기도 하지만 그 당시 공부한답시고 남녀가 여관방에 모이는게 좀..그랬다. 요즘은 단종된 약, '타이밍'이란 각성제를 털어넣고는 초저녁을 달린다. 이따금 더운 여관방을 나와, 옥상에서 음료를 마시며 밤하늘을 쳐다보기도 하고. 이윽고 버스 시간에 맞춰 그 사람이랑 몇몇은 집으로 가고 그때부터 난 또 방전 상태.. 옥상을 오르락 내리락.. 여름밤을 올려다보며 별하나 나하나.. 그렇게.. 몽상가는 새벽을 만나고.. One Summer Dream .. 그 날 시험치면서.. 절반은 졸다가 교수님께 바가지로 욕먹었어.
장兄.. 복학생 형이었는데, 영특하고 재치있고 유연한 사람이었어, 특히 정이 가는 선배였지. 그 선배, 독특하게도 학교 앞 여관방을 얻어서 살림을 차렸어. 교직에 계신 형수님이랑 사실혼 관계에 있던거야. 이따금씩 몰려가서 신세지곤 했는데,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보기 좋았다. 어느 날.. 시험기간 중의 도서관, 형수가 쫓아와서 '형님 좀 어떻게 해봐'라며 안달이다. 뭔 일인가 했더니, 두 사람이 사소한 걸로 다툰 모양인데 아 글쎄, 장兄 이 양반이 삐쳐서는 '나 시험 안 쳐'.. 그러고 있는거야. 신문을 펼쳐든 채 도서관에 반쯤 누워서는 꼼짝을 않는거지. 하여튼.. 참 재미있고 순수하기도 한 사람이었어. 결국, 어처구니 없이 몇 과목 펑크내고는 그 선배 제 때 졸업 못했던 기억이. 근데, 따뜻한 작년 어느 날.. 모르는 전화를 받았어. '기억하겠어? 나, 장兄이야 ~' 그 형.. 스님되셨대..
그 사람에게.. 정말 많은 음악을 선물했었다. 만나서 늘 들려주고, 테입에 녹음해서 전해주고.. 그러니까, 얼굴 마주보고 마음 그대로를 전하지 못하니까 용기가 없으니까 음악으로 얘기를 한거곘지. 어떤 테입은.. 앞 뒤로 스물대여섯 곡의 제목을 연결하면 한 장의 편지가 될 정도였어. 지금 생각해도 정말 지독한 작업이었다. 마치 어느 노랫말 처럼, '당신을 사랑한단 말..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쉽게 떠오르질 않네요..' 음악으로 마음을 표현할 밖에, 그 음악을 듣고 내 마음을 알거라 생각하면서. 참.. 말을 하면 될 걸.. 한 마디면 될 걸.. 어쨌든.. 그 사람이 늘 표정으로 화답했었다.
하숙동네에서 10분거리.. 75번 종점 쪽으로, '청실'이란 술집이 있었지. 지하에 허름한, 합판으로 1평 남짓의 방을 나눈 저급의 주점. 술을 안 마시니 갈 일이 없지만 하숙동지들 따라 서너번 갔었다. 거기서 서비스하던 '장양'. 동남아 여인같은 외모에 깜찍했던 여인네, 허스키한 목소리가 인상적이던 숙녀였어. 몇 번 가서 점잖게(?) 굴었더니 얘기가 통했던거 같고 어쩌다.. 그 즈음 학교축제에 파트너로 놀러가자고 다들 약속을 했다. 막상.. 축제 때 다른 녀석들은 후배들이랑 어울려 갔지만 오지랍넓게 약속지킨다고 미스 장을 데리고 갔다. 하루 종일 캠퍼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사실, 뭐 불편한 마음은 없었어. 오가다 마주친 녀석들이 후배들에게 이러쿵저러쿵 얘기했을테지만 상관없었고..(공범들 주제에 말이야) 고마워하는 미스 장이 오히려 안스럽다는 생각이. 근데.. 다행스럽게 그날 그 사람을 마주치지는 않았어..
어쩌다 그사람이 머리를 묶고 오는 날.. 어떻게 묶냐하면, 올빽으로 모아서 댕기머리처럼 묶는거야. 약간 가뭇한 피부에 커다란 눈, 짧은 댕기머리 웃는 입매나 치열은 더도 덜도말고 요즘 TV의 누구 같았던, 인디언 소녀같은 그 사람.. 특히, 여름철의 그 모습이면 뭐라 말할 수 없지. 마주 앉아 있어도, 차를 같이 마셔도 그 날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별 대꾸를 할 수가 없었네. 나를 무중력상태로 만들던 최고의 모습, 근데.. 먼 훗날..딱 그 모습에, 눈물 머금은 쓸쓸한 웃음까지도 완벽히 어울릴 줄.. 그땐 미처 몰랐었지.. ... 藝盤예반 *.*
주말이지만 시험준비하느라 하행선기차를 안 탔어. 사실, 뭐 아직 날짜는 많이 남았는데 그냥 그 사람이랑 함께 있을 욕심으로 있는거지. 근데, 오늘 그 사람이 도서관에 못 온대네.. 뭔 일이 있다고. 휴.. 김빠지는데..? 시험준비하는 학생들이 많긴 하지만 일요일의 캠퍼스는 아무래도, 적당히 여유있고 느슨한 분위기다. 식사시간도 몰리지 않고 자유롭게들. 혼자 보내는 일요일.. 그것도 도서관에서의 하루는 이륙하지 못하는 비행기같은 느낌이다, 활주로에서 윙윙거리고만 있는. 막상 발동이 걸리지 않는, 박차고 오르지 못하는 슬로우모션같은 하루를 보냈다. 이거야 원.. 어느새 그 사람이라는 칩이 빠지면 무기력해지는 로봇같은 내 일상.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랑 다툰 기억이 없는거 같애.. 흔히들 티격거리는 사랑싸움이라는 거, 그런 것도 거의 없었던 거 같고. 대신, 적당히 조심스럽게 대했던 기억이.. 아쉬움을 남기지 않으려 늘 애썼으니까. 뭐 굳이 완벽주의자는 아니지만 그 사람과 보내는 시간은 어떡하든, 완성된 그림처럼 남겨지길 원했었다. 함께한 시간, 그 공간은 언제나 정말 많이 좋아했던 그 사람, 그 기억이 언제나 내겐, 휴식.. 그것이었음을.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하숙집에 방이 여덟개쯤 있었나..? 그 중 서울출신 공대생이 있었어. 성경공부에 심취한 녀석이었는데, 이 놈이 좀 느끼해. 말투도 그렇고.. 적당히 남들에게 빌붙기도 하고, 요즘으로 치면 들이대는 스타일이라고 할까. 근데 공교롭게도 그 사람이랑 있을 때면 꼭 마주친다. 도서관이고 학생식당이고 만나기만 하면 다가와서, 예의 그 능글거리는 말투와 몸짓으로 들이대는거야. 자주 보게 된다며.. 동석하자느니, 친구 좀 소개시켜 달라느니.. 그 사람도 그 사람이지만 내가 죽을 맛이야. 사랑할 때는 주위를 경계하고 특히 친구를 조심하라는 노래처럼.. 근데 그 녀석.. 다쳐서 휴학하면서 하숙집 옮겼다.
... 藝盤 *.*
Dr. Hook - When You're In Love with a Beautiful Wo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