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구리 한 마리가 절뚝거리며 논길을 걸어가다,
멈칫 나를 보고 선다
내가 걷는 만큼 그도 걷는다
그 평행의 보폭 가운데 외로운 영혼의 고단한 투신이
고여있다.
어디론가 투신하려는 절대의 흔들림
해거름에 그는 일생일대의 큰 싸움을 시작하는 중이다
시골 개들은 이빨을 세우며 무리진다
넘어서지 말아야할 어떠한 경계가 있음을 서로 잘 알고 있다
직감이다
그가 털을 세운다
걸음을 멈추고 적들을 오랫동안 응시한다
나도 안다
지구의 한 켠을 걸어가는 겨울 나그네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나도 안다
이 싸움이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 겨울 나그네 

                                                     / 우대식       
 
                                                       ... 藝盤예반 *.*              
 


Rare Bird-- Sympat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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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으로 부드러운
가지를 드러내는 버드나무들이
바람의 방향 따라 흔들리는 걸
보며 나는 옥수수빵으로 아침을
때우고 마루를 닦기 시작한다
책들을 치우고 의자를 옮기고
쓰레기통을 비운 뒤 구석구석
물걸레질하다 보면 현관으로는
햇빛이 들어와 물살처럼 고이고
바람이 산 밑으로 쓸리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로
철새들이 말하며 가는 것을 본다.
순간 나는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낀다
오늘 같은 날은, 나를 상자 속에 가두어
두고 그리운 것들이 모두 집 밖에 있다.

   < 독신의 아침 

                                                     / 최하림       
 
                                                       ... 藝盤예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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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연애를 해라!
호랑이 눈썹을 빼고도 남을 그 아름다운 나이에
무엇보다도 연애를 해라.
네가 밤늦도록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두드리거나
음악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몹시 흐뭇하면서도 한편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단다.
그동안 너에게 수없이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마는,
또한 음악이 주는 그 고양된 영혼의 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마는, 그러나 책보다 음악보다 컴퓨터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역시 사람이 사람을 심혈을 기울여
사랑하는 연애가 아니겠느냐.
네가 허덕이는 엄마를 돕겠다는 갸륵한 마음으로
기꺼이 설거지를 하거나 분리된 쓰레기 봉지를 들고 나갈 때면
나는 속으로 울컥 화를 내곤 한단다.

딸아!

제발 그 따위 착한 딸을 집어치워라.
그리고 정숙한 학생도 집어치워라.
너는 네 여학교 교실에 붙어 있던 신사임당의
그 우아한 팔자를 행여라도 부러워하거나
이상형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닐 테지.
혹은 장차 결혼을 생각하며 행여라도 어떤 조건을
염두에 두어 계산을 한다거나 뭔가를 두려워하며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은 아닐 테지.

딸아!

너는 결코 그 누구도 아닌 너로서 살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당당하게 필생의 연애에 빠지기 바란다.
연애를 한다고해서 누구를 카페에서 만나고 함께 극장에 가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런 종류를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리라. 그런 것은 연애가 아니란다.
사람을 진실로 사귀는 것도 아니란다.
많은 경우의 결혼이 지루하고 불행한 것은
바로 그런 건성 연애를 사랑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딸아!

진실로 자기의 일을 누구에게도 기대거나 응석 떨지 않는
그 어른의 전 존재로서 먼저 연애를 하기를 바란다.
연애란 사람의 생명 속에 숨어 있는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푸른 불꽃이 튀어나오는 강렬한 에너지를 말한다.
그 에너지의 힘을 만나보지 못하고 체험해보지 못하고
어떻게 학문에 심취할 것이며 어떻게 자기의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냐.
그러나 세상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렇듯
깊고 뜨겁고 순수한 숨결을 내뿜는 야성의 생명성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솔직하게 말못할 것도 없다.
나는 아직도 제일의 소원의 하나로 연애를 꿈꾸고 있단다.
오랫동안 시를 써왔지만 그보다 더 오랫동안 수많은 덫과
타성에 걸려서 거짓 정숙성에 사로잡혀 무사하게 살아왔다.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여성의 삶이라는 것이
그런 범주였다는 것은 너도 잘 알고 있으리라.

딸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제발 이제부턴 다이어트를 멈추어라.
자본주의 상인의 줄자나 저울에나 맞는 그 나약한 몸으로
21세기를 어떻게 살아내려고 몸무게를 줄이느냐.
날씬한 허리, 균형 잡힌 몸매를 원할 때가 있다면
그것은 건강을 생각을 할 때 딱 한 가지뿐이다.
땀 흘려 일하고 입을 쩍 벌려서 상추쌈을 먹고 늑대 같은
야성의 힘으로 아이를 낳고 또 사랑을 하는
그런 넘치는 에너지를 가진 여성이 되거라.
탐스럽고 비옥한 대지와 무한한 생산성이야말로
여성의 진정한 힘이요, 미의 원천이란다.
다가오는 세기의 진정 아름다운 여성은 그렇듯 넘치는 야성과
넓고 순수한 힘을 지닌 여성일 것이다.
20세기의 업적의 하나로 남녀 차별과 고정관념이 무너진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이제 말라깽이가 아름답다는 고정관념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얼굴이 검은 여자도 아름답고 뚱뚱한 여자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 보아라. 얼마나 시원하고 편하고 멋있느냐.
몸이란 원래 그 자체의 음악을 가지고 있다지 않니?
자신의 몸을 자본주의 상인들이 만든 유치한 옷걸이로
전락시키거나 짧은 수명의 유행 상품으로 변장시킨
줄도 모르고 끝없이 몰려다니는 가련한 미인군이나 막무가내의 소
비의 인질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딸아!

지금 막 코앞에 다가오는 세기는 틀림없이
여성의 세기가 될 거라고 한다.
어서 네 가슴 속 깊이 숨쉬고 있는 야성의 불인
늑대(archetype)를 깨워라.
그리고 하늘이 흔들릴 정도로 포효하며 열정을 다해
연애를 하거라


   < 딸아! 연애를 해라!

                                                     / 문정희       
 
                                                       ... 藝盤예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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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귓 속에는 막다른 골목이 있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밀려난 작은 소리들이
따각따각 걸어 들어와
어둡고 찬 바닥에 몸을 누이는 슬픈 골목이 있고,

얼어터진 배추를 녹이기 위해

제 한 몸 기꺼이 태우는
새벽 농수산물시장의 장작불 소리가 있고,
리어카 바퀴를 붙들고 늘어지는
빌어먹을 첫눈의 신음소리가 있고,
좌판대 널빤지 위에서
푸른 수의를 껴입은 고등어가 토해놓은
비릿한 파도소리가 있고,
갈라진 손가락 끝에
잔멸치 떼를 키우는 어머니의
짜디짠 한숨소리가 있고,
한 땀 한 땀 나를 꿰어내던
겨울비의 따가운 박음질소리가 있고,

내 귓속 막다른 골목에는

소리들을 보호해주는 작고 아름다운
달팽이집이 있고,
아주 가끔
따뜻한 기도소리가 들어와 묵기도 하는
작지만 큰 세상이 있고,


   < 달팽이집이 있는 골목 

                                                     / 고영       
 
                                                       ... 藝盤예반 *.*              
 


In My Little Corner of the World · Lew Douglas & His Orchestra · Anita Bry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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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게 악수하고 마주앉은 자의 이름이 안 떠올라
건성으로 아는 체하며, 미안할까봐, 대충대충 화답하는 동안
나는 기실 그 빈말들한테 미안해,
창문을 좀 열어두려고 일어난다.

신이문역으로 전철이 들어오고, 그도 눈치챘으리라,

또다시 핸드폰이 울리고, 그가 돌아간 뒤

방금 들은 식당이름도 돌아서면 까먹는데

나에게 지워진 사람들, 주소도 안 떠오르는 거리들, 약속 장소와 날짜들,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 지켰어야 했던 것들과 갚아야 할 것들;
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세상에다가 그냥 두고 왔을꼬!

어느날 내가 살었는지 안 살었는지도 모를 삶이여

좀더 곁에 있어줬어야 할 사람,

이별을 깨끗하게 못해준 사람,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기대를 했을 사람을
그냥 두고 온
거기, 訃告도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제주 風蘭 한점 배달시키랴?


   < 두고 온 것들 >

                                                     / 황지우       
 
                                                       ... 藝盤예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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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나무 숲에 있다
우산을 접은 사람이 산 위에서 내려온다
산을 내려오면 아침 바다가 있고
은빛 못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목선이 있다
해변에는 레게의 리듬이
푸른 곰팡이 핀 술집의 매캐한 냄새처럼
너를 그리워하게 하는
고아의 저녁을 물들이고 있다

그 저녁에도 나는

아비장의 거리에 서있었다
황혼이, 이 신생 독립국가의 전통을 물들일 때도
나는, 아마, 코란이 낭송되는 이슬람의 사원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경전은 헌시(獻詩)이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무수한 ‘곳’에서
미루나무 가지처럼 무수한
너와, 너는, 너의, 너를, 만나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란 처음부터
흐르지 않는 사소한 연못들과 같았던 것
불멸처럼

저 타오르는 미루나무의
알 수 없는 가지, 가지마다에서
나는, 우리는,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고 있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강변의 불빛들이 오랜 기다림처럼 밝혀있는
번창한 灣의 부두를 걷고 있다 그리고 조금 후면
모오든 다리를 건너 네가 올 것이다

이 석양이 지고, 어둠이 오면
나는 지금도


   < 나는 지금도 미루나무 숲에 있다

                                                     / 함성호       
 
                                                       ... 藝盤예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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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종일 치맛자락 날리는
그녀의 종종걸음을 보고 있노라면
집안 가득 반짝이는 햇살들이
공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푸른 몸 슬슬 물들기 시작하는
화단의 단풍나무 잎새 위로
이제 마흔 줄 그녀의
언뜻언뜻 흔들리며 가는 눈빛,
숭숭 뼛속을 훑고 가는 바람조차도
저 종종걸음에 나가떨어지는 걸 보면
방안 가득 들어선 푸른 하늘이
절대 공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제 발걸음이 햇살이고 하늘인 걸
종종거리는 그녀만 모르고 있다

   < 아내의 종종걸음

                                                     / 고증식       
 
                                                       ... 藝盤예반 *.*              
 


Sheena Easton - Str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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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 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
기껏해야 버스길 삼백 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 종로5가

                                                   / 신동엽       
 
                                                                                ... 藝盤예반 *.*              
 


If I Fell - MonaLisa Tw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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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多寶塔)을 주웠다
국보 20호를 줍는 횡재(橫財)를 했다

석존(釋尊)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 속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을
두 발 닿은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

어깨 치고 지나간 행인 중에 석존이 계셨는가

고개를 떨구면 세상은 아무데나 불국정토 되는가

정신차려 다시 보면 빼알간 구리동전

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
쓸모 있는 듯 별 쓸모 없는 10 원짜리
그렇게 살아왔다는 듯, 그렇게 살라는 듯.


   < 다보탑을 줍다

                                                   / 유안진       
 
                                                                                ... 藝盤예반 *.*              
 


On The Road Again by Willie Nel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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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는 걸 쓰기 시작한 뒤 처음 맞는 8월은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술 마신 다음날 반쯤 시체가 된 몸은

꾸역꾸역 밖으로 나가고만 싶어 창문을 열면, 매미소리와
함께 마지막 여름이 가고 놀이터 아이들은 키 큰
잠자리채를 깃발처럼 흔들었다

무성한 벌레울음과 그 뒤에 오는 짧은 침묵 사이로

어제의 시가 유산되고, 간밤의 묵은 취기도 마저 빠져
나가고 맴맴, 맴돌기만 하던 생각도 가고 그대와 함께
여름이 간다

아직 배반할 시간은 충분한데......그리 높지고

푸르지도 않은 하늘 아래 구름은 또 비계 낀 듯
잔뜩 엉겨붙어 뭉게뭉게 떨어지지 않고 다만, 거짓말처럼
천천히 서로 겹쳐졌다 풀어지며 경계를 만들었다 허무는
힘으로 입술과 입술이 부딪치고 다만, 한 기억이 또
다른 기억을 뭉개며 제각기 비비다 울며 여름이 간다


   < 위험한 여름 

                                                   / 최영미       
 
                                                                                ... 藝盤예반 *.*              
 


August October / Robin Gi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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