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그 사람과 함께 시간의 많은 부분을 보내는 공간이 됐다. 뭐 굳이 책을 안보더라도 그냥 가까이 앉아서 낙서만 가득.. 모래성만 쌓았다..무너뜨렸다.. 조바심이 날 듯 싶으면 고맙게 식사시간, 뻔한 메뉴지만 함께 학생식당으로. 우르르 몰려가도 언제부턴가 자연스레 둘이 나란히 앉는다. 자판기커피에 디저트 수다까지, 2시간은 족히 흘려보내지. 요즘 대학생들의 화려한 사교공간과는 비교불가지만 그 시공간에서 많은 Story가 태어났다. 평생의 영적 자양분같은, 추억.. 첫사랑..
... 藝盤 *.*
Louis Armstrong -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
하숙집 앞에 조폐공사가 있었지.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군데군데 초소가 있는, 그 앞에 꽤 넓은 연못에는 연꽃이 가득했었다. 달빛 별빛 아래 이따금씩 나가본다. 조용한 시골의 밤하늘, 그 빛에 허락된 수면이 간지러운듯 반짝일 때, 난 그곳이 늘 바다같았어. 바람에 어울리는 잎의 움직임은 빛을 따르는 배와 같았고.. 바다에 머물러 존재하는 배, 나는 혼자.. 그곳에서 늘 그사람을 만난다..
동성로 대구역 쪽으로, 한보? 한일? 무슨 아케이드에 깔끔한 한정식집이 있었다. '나드리에' '나들이' , 들고 나는 어귀라는 방언에서 따왔다던가 영화배우 엄앵란씨가 직접 경영하던 한식당이었는데 입구에 큼지막이 붙어있는 옛 영화포스터, 흑백의 신성일씨 사진이랑, 참 특별한 느낌의 식당이었어. 지금도 맛이 그대로 입에 맴도는 비빔밥과 해물전골, 부침전이 주메뉴였는데 그녀가 맛있어해 자주 들렀고 몇 번을 마주친 엄앵란씨가 아는 척 해줬던 기억이 있다. 좋아하는 음식도 흡사했던 사람, 점차 닮은 꼴이 되어가는 우리..
생각해보면 커피의 거리라고 해도 좋으리. 동성로에서 대백을 거쳐 이곳저곳에, 뒷쪽 중앙도서관이던가..? 골목 사이사이마다 이국적인 많은 커피숍이 있었다. 요즘 스타일로 견줘도 조금도 손색없었던 예쁜 찻집들.. 특히, 커피숍마다 다양한 아이템이 유혹했는데. 싸이펀을 직접 세팅해서 커피를 내리는 재미, 다양한 찻잔과 스푼까지 제각각 선택할 수 있는 호사스러움, 곁들이는 쿠키까지.. '바다' 덕분에 앤틱스타일과 모던함이 공존하던 향기로운 공간이 언제부턴가 내 일상에 가득했다.
얼떨결에 둘 만의 사진을 찍은 후, 왠지 좀 더 용기가 생긴거 같아. 사진도 직접 전해주고, 얘기도 가끔 건네고 어쩌다 둘이서만 점심도 먹게되고, 주위에서 적당히들 비켜주기도 하고.. 내 마음의 여정이 시작된지도 꽤 오래지만, 이런 날이 오게 될 줄은 사실 몰랐지.. 이 기쁜 축복, 오래도록 그리고 싶다 나만의 그림으로..
드디어.. 그 날도 우르르 모여 한가히 캠퍼스를 배회하며, 이리저리 어울려 사진을 찍으면서 하루를 보낸다. 나도 자전거를 타고 빙빙 돌다가 가끔씩 함께 흔적을 남기고. 어느 순간, 너댓명이 벤치에서 한 컷을 찍고 그사람만 남긴채 다들 일어서는 순간.. 마침 자전거로 지나치는 나에게 카메라를 든 녀석이 급하게 소리친다. '야~~ 얼른 와라, 둘이서 한 장 찍어~~' 쑥스럽게.. 하지만 활짝 웃으며 찍힌 그 순간.. '세상에.. 이게 시작인가..?' 'Love Takes Time'
도서관을 나와 본관옆 오솔길을 지나 이방인의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하숙방 연탄불은 안전할까..? 요즘이야 그런 걱정없지만, 그땐 옆방 녀석들이 밑불을 슬쩍 바꿔치기 하곤 했다. 오솔길로 가다보면 몇 기의 묘지가 있는데 권세있는 집안인지, 보기에도 꾸며진 석물들이 대단하다. 야심한 시간이라 푸릇푸릇 인불도 날아다니지만 가끔씩 사람 혼을 빼는 건 교내 청소부 아줌마. 징검다리처럼 보도블럭 조각을 하나씩 밟으며 가다보면 인기척은 없는데 어디선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따라 랜턴도 안 갖고 왔는데 으시시하다. 눈을 부릅뜨고 앞을 보며 가다보면 훤한 달빛아래서 짙은 작업복에 보자기까지 머리에 쓰고, 갈고리로 낙엽을 긁어모으는 청소아줌마. 가슴철렁, 진땀 쫙.. 짧은 순간 욕이 절로 나오지, 젠장, 하필 이 야밤에.. 한숨 돌리며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달빛아래 그사람을 태운 버스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광주가 붉게 물들던 그 때.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던 캠퍼스, 그 날도 도서관에서 공상에 떠다니는데, 갑자기 바깥 분위기가 심상찮더니 모두들 우르르. 캠퍼스 입구에서부터 최루가스의 집중포화를 뚫고, 논둑을 달리고 도로를 건너 거대한 행렬로 나아간다. 고산을 지날 즈음 엄청난 병력에 도로가 차단되자 양쪽 산능선을 넘어 개미떼같이 흩어지고, 하늘에서는 헬기로 경고방송을 한다. 그렇게 간편한 도서관 복장에 슬리퍼를 신고 울컥 나선 걸음으로 오전에 압량벌을 떠나, 걷고 뛰고 또 걸어서 오후 늦게 도착한 대명동 캠퍼스. 학교에서 제공한 빵과 우유로 허기를 때우고는 학교버스로 다시 압량벌로. 정말 멀고 험한 길이다.. 자유를 향한 길도, 그사람을 향한 내 마음의 여정도..
도서관 난간에 나서면 예술대를 마주보게 되는데 호른 전공하는 기악과 남정네, 얘가 지네 연습실 베란다에서 꼭 도서관쪽을 보고 입을 푼다.
햇빛에 반짝이는 관악기가 풀어내는 품위. 레퍼토리는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 Eb major 3악장. 도서관 붙박이 터줏대감인 고시생 대표들이랑 시끄럽다고 몇번을 실랑이 했지만, 자유로운 소리의 넘나듬을 어찌 할 수도 없고. 사실.. 도서관에서 졸다 가끔씩 운치있게 들리기도 한다. 그 사람이 문득 얘기하지, ' 왠 장학퀴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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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ydn Concerto In E-Flat Major For Trumpet And Orchestra, H. Vlle: No.l: lll. Allegro-Alison Bals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