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도시이긴 하지만, 4년 동안 제대로 눈구경은 못한거 같다. 쌓여서 불편을 느꼈던 적은 고사하고 '신나게' 내리는 걸 본 기억이 없어. 언젠가.. 도서관에 있는데 갑자기 여기저기서 웅성거려 밖을 봤더니 꽤 세찬 진눈깨비가 내린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 둘씩 책을 주섬주섬 챙겨 나가는 선남선녀들.. 근데 젠장, 그 사람은 아까 수업 끝나고 버스 탔는데, 지금쯤 집에 갔을려나? 도중에 눈을 보곤 친구들이랑 동성로에서 커피 마시나? 집에 전화 한번 해봐? 아니지.. 요즘 그 사람 엄마가 은근히 견제한다는데 괜히.. 연필만 빙글빙글 돌리다 학생회관 음악다방으로 갔다. 와~ 젊은 애들이 눈 좀 온다고 센치하긴, 빈자리가 없이 바글바글. 구석에 합석해서는 줄창 음악신청을 해댔다, 그날은 선곡 성적도 좋았어. 비록 쌓이지 않고 촉촉히 녹아버리지만, 한동안 날리던 눈발아래 행복한 공상으로 긴 시간을 보낸다. 다음날 강의실에서 그 사람.. '어? 거긴 눈 안왔는데??'..
한국으로 오는 길에 비장한 각오를 하고는 전자제품,부엌용품,그리고 이쑤시개 세트까지 생각나는 대로 몽땅 다 사 버렸습니다 언젠가 그녀가 혼수 문제로 골치 아파할 것도 같고 그런 것들을 고르러 다닐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어쨌든 한국에선 너무 비싸기 때문에 이 기회에 모두 사 놔야 한다고 필요도 없다시는 부모님을 4천만번쯤 설득하고 꼬시고 어쨌든 저 세탁기 앞에서 내 미니 마우스 팬티를 빨고 있을 그녀의 황홀한 모습을 생각하며 물건을 고르는 저는 내심 행복하기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그 세탁기 앞에는 며칠마다 한번씩 오시는 아줌마가 대신 서 있고 빨래를 돌릴 때마다 꼭한마디씩 합니다 몇살인데 이런 팬티를 입냐고...
바쁘다는 건.. 필연적으로 두 가지를 잃게 된다고 하지, 건강과 기회. 돌보지 못하고, 미처 포착하지 못한다는 얘기. 이렇게 떠밀려 앞만 보는 치열한 현실에서, 과거의 추억에만 젖어있다는 게 그렇지 좀..? '미련'이라는 거.. 그게 참 '미련'한 거 같기도 해. 애절하고 따뜻했던 그 시절 몇 년도, 내 모든 것을 지배하던 그 사람도 따지고보면, 내 삶 전체 중 갈수록 작은 부분, 많고 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인데. 하지만, 추억할 땐 오직 추억할 뿐, 혼자서라도 끝까지 완주할까봐..
어느 미화심사 날이었던가 그녀는 열심히 교실 바닥을 쓸어내고 있었고 나는 미래 우리 안방을 닦아 줄 그녀의 사랑스런 모습을 상상하며 가끔 흐믓한 표정도 몰래 지어 가며 한참을 보고 있을 때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교실 밖을 나가 버린다 그녀가 놔두고 간 빗자루를 조심스레 한참이나 만지고 있었다 아! 따뜻해
어느 학기.. 중앙공원 쪽 '무궁화 캐빈'? 인가 하는 디스코텍에서 종강파티를 했다. 자주 갔던 클럽이었지.. 뭐, 놀러간게 아니라 밴드 '피닉스'에 있으면서 다른 과 행사에 출장(?)을 갔었거든. 지하에 있는 클럽인데 천장이 꽤 낮아 이런저런 장식 아래 마치 정글 속 같은 독특한 분위기였다. 그 시절, 학과 행사라는게 그림이 뻔하잖아? 교수님 인사 간단히 끝나고.. 선물 증정하고, 그리고는 먹으면서 바~로 흔드는 거지 뭐. 디스코 타임과 블루스 타임이 반복되고 막간에 행운권 추첨하고. 정신없이 번쩍거리는 암흑 속 스테이지에 그 사람이랑 여전사 4인방을 중심으로 신나게들 노는데.. 그런 그 사람을 어둠 속에서 마음놓고 바라봤어. 시대를 막론하고 역시 그런거 같애. 예쁜 애들이 공부까지 잘 하고, 성격도 활발.. 리더쉽도 탁월.. 거기다 놀기도 잘하니. 음악 챙기랴, 여기저기 먹거리 챙겨주랴.. 사진기사 노릇하랴.. 소매 걷어올린 군복상의에 땀을 삐질삐질 흘린채, 드라이한 표정으로 찰칵 찍힌 한 컷.. 지금도 앨범에 꽂혀있는 모습이다.
냉천에서의 빗속데이트 이후, 우산을 같이 쓸 절호의 찬스가 생겼어. 다들 도서관에 있는데 예기치 않게 비가 쏟아지지 뭐야. 시내쪽 애들은 별 생각없이 왔지만, 압량벌쪽은 아침부터 잔뜩 찌푸렸던 터라 우산을 갖고 왔었거든. 좀 있다 그치겠지..라는 기대와 달리 꽤 굵은 빗방울이 잦아들 줄 모르고. 한참을 도서관밖을 내다보다, 그 놈의 오지랖이 또 발동을 한다. 코 앞이라는 운명(?)땜시 하숙방으로 가서 여분의 우산을 챙겨왔어. 왜냐믄, 그 놈의 여전사 4인방이 같이 있으니 그 사람만 쏙 빼서 나갈 순 없잖아. 그날.. 오지랖넓은 물자보급덕에 여전사들, 느긋하게 책보다가 저녁까지 먹고는 둘씩 팔짱끼고 운치있게 집에 갔어. 난?.. 야상 뒤집어쓰고 하숙방까지 구보했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