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내 남자친구는 트럼페터입니다. 조금씩 폐허가 된 생활이 놓여 있지만 그쪽 벌판은 잘 보지 않습니다. 저 온기를 서로 부비는 풀잎들에게서 이 마음 끝까지 뻗은 길을 소리들이 가고 있습니다. 삭은 내의를 걸친 채 그는 트럼펫 부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누구든지 꿈을 선택하고 꿈으로만 자신을 꾸미는 일. 숲속의 나무들이 그런 일 속에는 잔뜩 묻혀 있습니다. 그가 부는 트럼펫 소리는 하늘에서 먼저 가 있던 소리를 만나 어깨를 감싸고 같이 걷습니다. 북만드는 나무라도 일찍 찍으러 간 모양입니다. 내 남자 친구는.
강의실에서.. 학교식당에서도.. 늘 여럿이 어울려 다니지만, 제대로 눈길 한번 마주치질 않는다.. 다른 녀석들과는 웃으며 얘기거리도 많구만.. 가끔씩 훔쳐보는 일도 보통 힘든 일이 아냐.. 혹 .. 그 사람도 나처럼 몰래 훔쳐보는건지.. 아까 물을 마시며 언뜻 보는거 같기도 했지..? ........ 불쑥 일어나 손흔들며 스쿨버스에 오르는 그 사람.. 내일 또 내일 !
<당신을 위로하지 못합니다.> 이 말은 어느 뛰어난 설교가(說敎家)의 저서에서 읽은 한 귀절이지만, 반드시 옳게 말했다곤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위로를 받고 있으며 때로 그 위로는 흡족한 수량(水量)으로 도도히 흐르는 큰 강을 이루기도 합니다. 그 사람 때문에 기쁘다는 이런 마음이 불시에 백만의 등불을 켜고 세찬 전율(戰慄)의 희열로 부풀어 오르며, 훈훈한 수증기가 무변(無邊)의 안개같이 또는 봄 아지랭이 같이 서려 오를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땐 소중한 사람이 우리를 버리고 멀리 가 버린 듯 싶기도 했었으며, 기실 그 때문에 비탄의 수렁으로 처참히 굴러 떨어지기도 했지만 우리의 생명이 다하기 전에 종내 다시 돌아 와 주었다면 이 또한 얼마나 값어치 있는 위로요 축복이겠습니까.
받아 들이는 일이 하나의 용단이라면 돌아 오는 일은 그 이상의 용단일 줄 압니다. 자존심을 꺾고 그 사람을 다시 맞는 일에 비해, 자존심을 포기하고 탕자(蕩子)의 귀향(歸鄕)을 수긍하는 어떤 겸허한 행동 앞에 더욱 영접을 후하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돌아 오라 다리위에 그 여자 만약 돌아 온다면 나는 말하리라 아아 기쁘다라고
이 한 절의 시구(詩句)는 생각 날 적마다 항상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습니다. 내게도 떠나 가버린 사람이 있었지만 끝내 잊을 길이 없어 다시 돌아 오게 했습니다. 진실로 내 영혼에의 통로 그 어디쯤까지 돌아 와 주었는지 익히 알 수가 없으나마, 내 마음은 기껍고 고맙고 마치도 녹슨 은 촉대를 환히 닦고 기름한 새 초를 갈아 꽂는 것만 같았습니다.
주저없이 불을 댕겨 붙였습니다. 만약에 또 그 사람이 나를 떠나 가게 되더라도 내 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에 다시 돌아와 준다면 거듭 몇번이라도 위와 같은 의미가 생겨 날 줄로 나는 믿으며, 더구나 그가 확신에 넘쳐서 내 이름을 불러 주면 참았던 눈물의 둑이 터지고 부끄럽지도 않으며, 잃어버란 시간을 타산하는 일도 없이 오히려 동녀(童女)처럼 호곡한들 무어 나쁘겠습니까?
계산하는 총명은 때로 진실을 요약하고 귀결짓는 총명과 별개의 것이던 일을 나는 여러번 보아 왔다고 증언하고 싶습니다. 부유(富裕)라는 말의 그 뜻조차 분량으로 많이 가짐을 일컫지 아니하고 정녕 요긴한 걸 놓치잖는 그런 이치의 것일 줄로 여겨지거니, 하물며 여인의 한평생 무류(無類)의 빈객(賓客)이라 부를 그 한사람을 잃는대서야 차마 비탄과오욕(汚辱)을 어찌나 견디겠습니까. 떠나가 버린 남편이 있으면 여인이 기어코 데려 와야 하겠습니다. 자잘한 수치(數値)에서야 억울하고 분하고 아쉬웠다 해도 차라리 얼마든지 밑져 주고서, 가장 큰 단위의 묵직한 주산알 하나에선 끝내 이를 확보하는 궁극의 합리만을 꼭 성취해야 합니다.
서두르지 않고 격정과 비탄을 무섭게 참으며 너그러우며 마침내 뜻에 달하고 귀중한 것을 아니 놓치는 그런 슬기로운 처신(處身)을 이루어야 합니다. 절망은 죽음이 와 버리는 일 그것 뿐입니다. 만약에 죽음이 와서 귀중한 누구를 영영 빼앗아 갔다거나 하면, 그래서 맨주먹으로 바위를 부수려 하듯이 쾅쾅 운명의 돌문을 피흘리며 두드릴 그때에만 돌문 그 너머서 절망의 신음이 울려 옴을 어쩔 수 없다고나 할 것인지, 아직 얼마간의 시간이 우리 곁에 있고 생명이 남아 있어 모든 행위와 의지(意志)의 기반(基盤)이 되어 주고 있을 적에야 섣불리 무엇 때문에 절망 하겠습니까? 심지어는 죽음이 가로 놓여 있을 때라 해도 그 딱딱한 사구(砂丘)에 한가닥 청신한 샘물을 뿜어 올리게 할 그런 구원(救援)과 위로를 가르치는 종교도 있는 것을......
위로 있음을 긍정하고 손쉽게 비애(悲哀)를 사귀지 말며 생활을 옳게 갈(耕)고 마침내 큰 보람을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진실로 사랑하기 위해서 선택한 이를 결코 잃지 않는 여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자기가 만든 대리석상을 바라보며 매양 침울한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언제나 보다 더 아름다운 것에의 추구를 그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한결 더 아름다운 것... 이를 갈망하는 건 훌륭한 목적이 될 수 있으며, 더 높고 더 오래가는 아름다움을 찾아 내려 하는 손은 그만치 더 힘세고 근면하고 또 세밀하지 않으면 안될 줄 압니다. 믿어 보기도 전에 실망하고 가꾸기도 전에 낙심하며 주어 보지도 않고 지레 빼았아 버리는 일과는 반대로, 주고 더 주며 믿고 또 더욱 믿는 끈기와 침착함과 한없이도 꿈꾸는 마음을 갖지 않고선 아무 것도 찾아 내기 어렵습니다.
위에서 말한 미켈란젤로가 하루는 성당을 세우는 공사장에 나가 보았습니다. 쓸모가 없어 내버린 몇 개의 돌이 아무렇게나 내굴려 있는 데에서 그는 거의 한나절을 서성이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러다가 해도 다 저물었을 무렵 그는 결심을 하고 공사장 감독에게 버려진 돌 한 덩어리를 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필요하면 그냥 가져가시오. 한데 대관절 이 못생긴 돌을 무엇에 쓰렵니까?"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고요히 확신에 넘쳐 대답했습니다. "한 사나이 때문이요. 이 돌 속에 갇혀 있는 한 남자를 풀어 주지 않고는 도저히 배길 수 없구료." 그리하여 미켈란젤로는 그 돌을 쪼아 불멸의 소상(塑像)하나를 더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시들리는 것에 비해 보존하는 능력이 더 값어치 있듯이, 보존에만 그치지 않고 더욱 허공에서 불러 내는 창조의 힘이 있다면 이 오죽이나 큰 보람이겠습니까. 그러나 지혜 있는 이는 능히 이런 일을 할 수 있나 봅니다. 이미 오늘날의 과학이 물에서 전기를 일구어 내고 그 전기를 통해 바다 양켠의 사람들이 육성의 대화를 손쉽게 나누는 일인들 기실 놀랍거니와, 정신의 영토 그 안에서도 장엄히 불붙혀 올리는 응려한 교환(交歡)과 신심(信心)들의 분류(奔流)는 참으로 얼마나한 경악(驚愕)이겠습니까. 아니 더 소박하고 느긋하게 훨씬 음성을 낮추듯이 가만가만 얘기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사랑한다는 말 한번도 쓰지 않고 평생을 사랑하기만 하는 두메 산골의 의 좋은 부부나 신앙의 겉치례를 하지 않고도 신의 마음을 가장 흡사하게 본따 사는 사람들의 그 어여쁨 같은 것을...... 불후(不朽)의 충실(充實)이 있을 수 있다고 하면 참으로 한번 태어났던 생명을 몇번이라도 거듭 소생시키는 생명의 저력(底力), 실로 거기에서만 가능하리라 여겨 집니다. 뿌리를 갖지 못한 나무를 덧없게 보는 심리 그대로 정신의 저력을 전혀 못 가진 사람 역시 \ 연민의 대상일 뿐입니다. 연민의 내용인 모멸, 모멸의 이름 속의 그 엄청난 치욕을 우리는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한계를 넓혀 가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능력과 사랑을 무한히 부풀려 내려면 그 사람 자신은 가장 작고 겸손해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도 말했던 것 같지만 육체는 벌거벗은 상태를 수치스러워하고 정신은 옷을 입었을때 부끄러워합니다. 벗은 정신 그리고 무구(無垢)한 영혼으로 있으면서 생명의 의미를 확대하고 또한 스스로를 위해선 검약하되 모쪼록 인색하지 않은 수급자(授給者)가 되고 싶습니다.
한 젊은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 먹이는 시간마다 가장 깨끗하고 어여쁘게 단장을 한다는 얘기는 퍽도 아름다왔습니다. 성당 제탁(祭卓)위에 밤새도록 켜 두는 성체등(聖體燈)의 빛 둘레.......그처럼도 신성하고 환한 이야기라 여겨졌었습니다.
흔히 주되 누구에게 줍니까. 우리가 주지 않으면 그 그릇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부터 주어야 합니다. 한 사람밖에 어머니를 못 가지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남편에게 더욱 많이 주어야 합니다. 사생할에 연결되는 가족들에게 먼저 흠씬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말이 어쩌면 시야가 좁은 얘기로 들릴지 모르나, 나의 생각으론 우리 나라만큼 사생할을 등한히 하고 자기의 가족을 소홀히 여기는 나라가 없는 것만 같습니다. 아내에게 사랑을 표시한다는 풍속은 실없이 군자의 위엄을 깍아 내리는 줄 알았던 사람들 때문에 우리의 남편들 또한 어려서 아내를 아끼는 아버지의 모습을 별반 보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이 얼마나 삭막하고 불행한 교육이었습니까? 우리 연대(年代)에 와서나마 부부간의 애정은 물론 냉엄(冷嚴)만을 일삼지 않는 부정(父情), 그리고 더욱 훈훈한 모정에 감싸여 마음껏 단란한 가정 풍경을 이루어 살고 싶습니다. To be Continued.....
하숙집으로 시외전화가 힘들던 시절.. 강의 시작 전 밖으로 나를 부른다. 둘이서 얘기를 나눈 적이 없던 터라 깜짝 놀랐는데.. 우리집에서 전화가 왔다고. 연락이 안되서, 실례지만 얘기 좀 전해 달라 하더라고. 이런저런 얘기를 건네고 돌아서는 그 사람.. 세상에 .. 이게 왠일이야. 그 날 .. 내 머릿속은.. '오늘은 휴강' ..
"연애하는 여자에게 있어선 남자가 그 목적이다. 그러나 연애하는 남자에게 있어서는 그가 아무리 열중하고 있을 때라 해도 여자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이런 말이 진실이겠습니까? "여자는 남자를 위해 만들어지고 남자는 신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 말이 또한 옳겠습니까? "남자는 원하고 여자는 준다." 정녕 이런 것이며 또 이래서 좋겠습니까? 남자들은 결코 다 주지 않으며 항시 먼저 걸어 가 버린다고만 여겨지는 그 허다한 소행을 우리는 어떻게 삭여 넘겨야 하겠습니까?
하나의 슬픔 끝에 또 하나의 슬픔이 와서 슬픔을 이어 가는 한없는 고리(環)가 되기도 하는 사이 우리는 늙고 마침내 죽는다고 여겨지는 그 춥고 헐벗은 심회(心懷), 평범한 의무와 굴곡 없는 상심(傷心)의 되풀이, 그리고 긴 시간...... 에누리 없이 위의 모두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차탄(嗟歎)만을 일삼을 수는 없습니다.
남편은 노상 차갑고, 낭비가 심하고, 심지어는 다른 여자를 사귀어 깊은 관계에 빠지고, 그 때문에 연거푸 외박을 한다고 해도 아내들은 역시 아이를 키우면서 빈집을 지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격이 우월해서가 아니고 참아 넘기는 힘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한 시간 한 시간을 깜빡 죽는 것과 같이 어렵게 견디고 모질게 지탱해 간다고 해도 종내 이 길만이 아내들의 생활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사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얘기가 낡은 윤리와 묵은 부덕을 표방하는 것 같지만, 실상 여기엔 낡고 새로운 이치가 따로 없고 언제건 변함없는 삶의 원리가 꼭 한가지 있을 뿐입니다.
"여자를 사랑하는 건 우리가 고독한 증거이다." 이렇게 말한 이가 있습니다. 물론 남자입니다. 하면 그들도 처음엔 여자를 통한 고독의 치유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무섭게 독점의 의욕을 갖는 것이고, 한번 여자의 사랑속에 들어 온 남자는 누구나 숨이 막힐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이탈을 꿈꾸게 되고 열심히 몸부림쳐서 종내 홀가분한 맨몸뚱이가 다시 되었습니다. 얼마쯤 허전했지만 차라리 이걸 견디는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쯤 되면 내 얘기가 자못 과장된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실은 별반 먼 거리의 얘기가 아닐 줄로 나는 믿습니다. 남자는 정복을 여자는 독점을 요구하며 양편이 다 터무니 없이 과욕(過慾)에 빠지길 잘 합니다. 마침내 서로가 다 고독하게 되고 고뇌를 외치는 처절한 고함을 발하게 됩니다. 하면 이건 정녕 예사로운 비극이 아닙니다. To be Continued.....
무릇 사람은 비교의 원리를 초월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우며, 실로 우리들이 남편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차라리 우리 속의 한 가닥 본능처럼도 단순하며 무의식한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걸 수긍하기에 이릅니다.
우리가 남편을 사랑함은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만 우리의 인생이 있다고 믿는 그 탓이며, 내 인생속의 두드러진 건축물이 바로 그 사람이요, 다른 말로 표현해서 그는 곧 영원한 약속과 같은 남자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꿈을 덮어 버리는 현실이며, 모든 시간위에 새겨지는 발자국을 그들은 역력히 남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남편은 그 아내의 생애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며, 다른데 옮길 수 없는 절대의 원심(圓心)인 탓으로, 되물릴 수 없는 서원(誓願)의 생생한 증표(證票)인 탓으로, 동시에 지엄(至嚴)한 말씀으로 하늘이 위의 모든 마음을 품도록 시키시는 묵언의 명령 그 탓으로, 여인들은 무한정 남편을 섬기고 아끼고 사랑해 가는 줄 압니다.
아니 오히려 더 정직하고 더 근원적인 이유는 아이들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내 자식과 그 사람이 천륜(天倫)의 끄나불에 매여 있다는 실로 그 한가닥 오성(悟性)이 짚어 주는 높고 질기고 참 기막힌 마음 있어, 그 때문에 이리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위의 모든 이유와 그 이론으로써 사랑하기에 앞서 가장 단순하게 오직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한다는 마음이 되어 살고 싶습니다. 행복이나 영원에 대한 욕구보다도 더 순열(純熱)한 바람으로 남편을 원하며, 담담히 그리고 한없이 사랑하고 싶어서만 사랑한다는 마음이 되어 있고 싶습니다.
<여자는 누군가에 관해 얘기하고 싶어하고 남자는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는 말이 어느 책에 쓰여 있었습니다만, 애당초 남자들은 일을 위해 생겨 나고 욕망에 붙잡히길 잘하도록 만들어진 데에 비해, 여성은 언제나 사람에 집착하여 누군가에 연결되는 피 묻은 애환으로 자고 새기 마련인 듯 보입니다. 여인들은 항시 몰아(沒我)의 열정으로 사랑하는 이를 붙잡아 들이려 하고, 저들 남성은 오히려 이를 벗어나려 몸달아 하는 이 모순과 불합리가 새삼 아프고 기이(奇異)한 볼거리인 것입니다. 그런대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때로 참을 수 없는 일도 참고, 굽힐 수 없는 일도 굽혀 주며 신뢰와 겸양과 거듭거듭 씨 뿌리는 계획으로, 다시 그걸 가꾸어 올리는 생할의 실천으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유감스럽게도 경멸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고뇌에 이르러 보지 않은 남자가 사랑에 대해 과연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니이체의 말입니다. 하나의 사랑은 많은 곤혹(困惑)에 부딪히고 무수한 상처를 입으면서 조금씩 닦여 가는 구슬과 같습니다. 짧은 한때 숨가쁘고 격렬하게 지내기 보다는 긴 시간을 두고 차분하며 믿을 수 있는 깊이를 쌓아 갈 궁리를 마음 안에 담으십시다.
<소유는 적으나 존재는 넉넉하게.>란 말도 있지만, 저마다의 생명 안에 무엇을 담으며 어떻게 넘치려 하는가에 있어서도 아울러 속 깊이 이를 긍정하고 여기에 전념(專念)하는 시람, 그럼으로써 정녕 사는가 싶게 살아 가는 연인들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To be Continued.....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 캠퍼스에서 그 시림의 집까지. 다시 하숙집으로 돌아오기에는 꽤나 먼. 그치만 바래다 주는 이도 전혀 힘들지 않고 미안한듯.. 그 사람도 좋아했고. 행여 나오시는 엄마 볼까, 조용한 문 앞에서의 판토마임같은 이별. 몇 번을 돌아보며 도둑발걸음으로 골목을 빠져 나올 때 그 짧은 이별을 채워주듯, 문득 올려다 본 하늘엔 하얀 달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