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오매 일찌기 홀몸으로 논 서마지기 농약 뿌리다 허연 두 눈 치뜨고 돌아가시고 두견이 피 토하는 울음을 뒤로 서울로 캄캄하게 떠나올 제에 누나 따라 간다며 숙모 손을 뿌리치고 치마자락 매달리던 코흘리개 영석이가 어느새 중학생이 되어 영어회화 듣기평가 시험에 카세트 테이프가 없어서 잘사는 집 애들보다 점수가 뒤진다며 자정이 넘도록 영어책을 읽다가 잠꼬대로까지 중얼거린다 누나는 미국전자회사 공순이가 되었어도 세컨라인 리더가 되어 QC활동에 목이 붓도록 칼처럼 곤두세워 오버타임을 더 해도 다음 달엔 우리 영석이 카세트랑 테이프는 꼭 사서 주마 잔업 끝난 자정거리 휘청거려 오면 하지 말라 화를 내고 다짐을 해도 영석이는 서툰 솜씨로 밥을 지어 차려 놓고 낭랑하게 꼬부라진 영어회화 공부를 한다 누나는 못배워서 무식한 공순이지만 영석이 너만은 공부 잘해서 꼭 꼭 훌륭한 사람 되거라 하지만 영석아 남 위에 올라서서 피눈물 흘리게 하지는 말아라 네가 영어공부에 열중할 때마다 누나는 노조에서 배운 우리나라 역사가 생각난다 부유층 아들딸들이 유치원서부터 영어회화 교육에다 외국인학교 나가고 중학생인 네가 잠꼬대로까지 영어회화 중얼거리고 거리 간판이나 상표까지 꼬부랑 글씨 천지인데 테레비나 라디오에서도 영어회화쯤 매끈하게 굴릴 수 있어야 세련되고 교양있는 현대인이라는데 무식한 공순이 누나는 미국전자회사 세컨라인 리더 누나는 자꾸만 자꾸만 노조에서 배운 우리나라 역사가 생각난다 말도, 글도, 성도, 혼도 빼앗아 가고 논도, 밭도, 식량도, 생산물까지 마침내 노동자의 생명까지도 차근차근 침략하던 일제하 조선어 말살 생각이 난다 미국전자회사 세컨라인 리더 누나는 컨베이어 벨트에 밀려드는 부품에 QC활동에 칼처럼 곤두설수록 조선어 말살 생각이 난다 < 영어회화 > / 박노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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