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이랑씩 타고 앉아 호미로 찍어 내는 독새풀처럼 좀처럼 죽지 않고 되살아나는 손바닥의 풀물 같은 내 가족들 주민등록등본을 떼어 보면 아직도 보리밭에서 잡풀을 매듯 한칸씩 자리잡고 있는 식구들 그 가운데 몇 개의 이름을 붉게 그어지고 다들 어디로 갔나 무성의한 잉크 글씨만 남아 세상에 우리가 만나 가족을 이룰 줄이야 그 배고픈 보리밭을 오리걸음치며 뽑아도 뽑아도 봄이면 다시 무성해지던 독새풀처럼 얼굴 맞대고 살아갈 줄이야 나는 보리피리를 만들던 솜씨를 살려 가난에다도 구멍을 내고 싶었다 목울대까지 차오르는 숨으로 궁핍한 날들을 노래하기 위해 마을에서 연기처럼 긴 꼬리를 풀며 아이들의 연이 올랐다 저녁 하늘로 누군가가 줄을 어지럽게 감을 때 몹시 바람을 타며 흔들리던 내 얼굴 나도 보리피리처럼 울면서 내 희망에다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풀리리, 풀리리, 풀냄새 나는 소리로 앞날의 모든 일이 잘 풀리리라고 슬프디슬픈 예언을 믿으며 혹시 나는 보리씨로 태어났거나 아니면 독새풀 꽃으로 피어난 그런 아이로 커야 할 것만 같았다 어른들은 모두가 보리밭을 따라 멀리 멀리 간 다음,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 보리밭 > / 임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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