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그런 날 있지. 나뭇잎이 흔들리고 눈 속으로 단풍잎이 우수수 쏟아져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 그런 날 말이지. 은행나무 아래 서서 은행잎보다 더 노랗게 물들고 있는 아이들의 머리카락 생각 없이 바라보며 꽁무니에 매달려 바람처럼 사라지는 폭주족의 소음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그런 날 말이지. 신발을 벗어들고 모래알 털어내며 두고 온 바다를 편지처럼 다시 읽는 지나간 여름 같은 그런 날 말이지. 쌓이는 은행잎 위로 또 은행잎 쌓이고 이제는 다 잊었다 생각하던 상처니 눈물이니 그런 것들이 종이 위로 번져가는 물방울처럼 소리 없이 밀고 오는 그런 날 말이지.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사기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가시덤풀 속을 누벼누벼 너른 벌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닥닥 달아나겠지. 아하하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돋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 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나는 가끔 사람들의 거친 물살에 떠밀려 세상이 뱉아놓은 그물에 덥석 걸려들기도 하는 멍청한 섬이었다 세상은 물론 망망대해였다 그렇게도 용솟음치던 바다 내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섬 하나를 삼킨 아득한 바다 어둠만 꽉꽉 내 몫이었다 나는 바다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바다는 귀가 다 잘려나가고 원시의 칠흙 같은 소리만 우우- 내 귀를 때렸다 차츰 부력이 빠지기 시작한 섬,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다 멀리 희미한 등대들이 빠진 부력을 뗏목처럼 타고 올라 또 다른 어둠으로 메우기 시작했다 로빈슨 크루소라고 이름 부르는 이상한 경보신호만 들리는 듯 했다 < 멍청한 섬> / 박선희 ... 藝盤예반 *.*
가난한 밤은 길다 수녀들이 지나가고 신부들이 지나가고 골판지 박스가 오고 신문지들이 오고 밤은 천천히 걷는다 소주병들이 여기저기 흩어지며 욕설을 폭죽처럼 터뜨린다 차곡차곡 쌓인 하루 위에 몸을 눕히면 잠 속으로 발자국이 찍히고 아직 밥을 먹지 못한 영혼이 휘파람 소리를 키운다 밤은 저 홀로 깊어가고 잠들지 못한 이들의 신발은 발레를 하듯 절뚝인다 < 노숙일기 > / 전기철 ... 藝盤예반 *.*
이것은 내가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시 나는 그 시를 쓸 수 있는 유일한 시인 모든 게 엉망이었을 때도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약물에 의존하려고도 가르침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잠을 자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시 쓰는 법을 배웠다. 바로 오늘 같은 밤 바로 나같은 누군가가 읽을지도 모를 이런 시를 위해. < 나의 시 > / 레너드 코헨 ... 藝盤예반 *.*
너구리 한 마리가 절뚝거리며 논길을 걸어가다, 멈칫 나를 보고 선다 내가 걷는 만큼 그도 걷는다 그 평행의 보폭 가운데 외로운 영혼의 고단한 투신이 고여있다. 어디론가 투신하려는 절대의 흔들림 해거름에 그는 일생일대의 큰 싸움을 시작하는 중이다 시골 개들은 이빨을 세우며 무리진다 넘어서지 말아야할 어떠한 경계가 있음을 서로 잘 알고 있다 직감이다 그가 털을 세운다 걸음을 멈추고 적들을 오랫동안 응시한다 나도 안다 지구의 한 켠을 걸어가는 겨울 나그네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나도 안다 이 싸움이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 겨울 나그네> / 우대식 ... 藝盤예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