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쓰면 황순원 선생께서 화를 내실지 모르지만 그의 기를 죽이기 위해서 쓰는 것인데, 나는 그와 사귀기 전에 그의 부친을 모시고 술좌석에 앉은 적이 많았다. 술좌석에 앉았다라고 하면 놀랄 사람이 많겠지만 물론 다리를 쭉 뻗고 마시는 그런 자리는 아니다. 여하튼 그런 사실에 대해 나는 그가 자주 콤플렉스를 느껴주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나는 그를 홍성원이 소개해서 회현동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서북지방 출신들의 특색 그대로, 술은 소주를 즐겨 마시는 모양이었다. 그때 홍은 동아일보에 <디데이의 병촌>을 연재하고 있었고, 그는 <비가>에 전념하고 있을 때이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자의 몸짓으로 제법 겸손하게 인사를 했으나 술좌석에서는 혼자 떠들어댔다. 술좌석에서 떠드는 그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 언제나 한 옥타브가 높다. 질풍노도의 시기였으므로, 거의 매일 우리는 명동의 학사 주점에서 매운탕에다가 소주를 시켜놓고 잘 익은 토마토 같은 얼굴을 하고 통금 한 시간 전까지 떠들어댔다. 그리고도 오랜 후에야 그와 나는 말을 놨다. 그 말을 놓게 된 경위라는 게 괴상하다. 그는 나와 사귄 지 이태 만인가 세 해 만인가 에든버러로 유학을 갔는데, 거기서 그는 정중한 어조로 말을 놓자고 제의를 해왔다. 아마도 순 한국말로 욕이 하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나로서는 큰맘먹고 그와 말을 놨다. 말을 놓고 나니 그렇게 다정다감한 친구였다. 편지로 놓게 된 말을 실제로 만나서 적용하는 데에는 몇십 분의 어색함이 요구되었지만, 여하튼 놓은 건 놓은 것이다. 그는 후안무치한 녀석이다. 나보다 한 급 정도는 급수가 낮은 바둑을(!) 맞수라고 악착같이 주장할 때나 자기가 포커를 제일 능률적으로 운영한다고 소리지를 때, 그리고 자기는 모르는 것이 없노라는 폼을 잡을 때, 자기 색시만이 가장 현모양처라고 주장할 때, 또 이건 정말 치사한 것이지만, 아들을 기적적으로 하나 낳고 나서 기쁘지 않은 척할 때 그는 특히 후안무치하다. 그러나 그가 파렴치한답지 않게 놀 때가 딱 한 분야 있는데, 그것은 문학 분야이다. 그는 엘리엇을 싫어하지만 서정주는 대단히 좋아하며, 엉뚱하게도 [두시언해]와 [에레미아]서를 좋아한다. 서정주와 김수영이 있는 한 그는 자기가 제일 시를 잘 쓴다고는 소리지르지 않겠지만, 그들만큼은 쓴다고 속으로 자부할 것이다. 엉큼한 놈이다. 그러나 그의 모든 자부와 허풍과 과장에도 불구하고 그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루오의 광대를 연상한다. <비가>의 어디에선가 김승옥이 소설 제목으로 빌려가겠다고 큰소리 뻥뻥 친 “광대의 옷을 빌려입고”란 시행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진면목은 비 내리는 밤 두시쯤 스텐카 라진의 절규를 들으며 고통스럽게 찡그리고 앉아 있는 광대처럼 느껴진다. 그가 새벽 두세시까지 그의 아버지처럼 소주를 혼자서 홀짝홀짝 마시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그는 다시 양행(洋行)을 했다가 되돌아오면서 나에게 폭넓은 노란색 넥타이를 배급했다. 설마 달고 다니라고 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그것은 광대스러운 것이었다. 그에게 나는 하나의 빚을 지고 있고 그 역시 그러하다. 그가 나에게 진 빚은 내가 그토록 애를 써서 그의 집 사들이기에 협조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아직 나에게 향응을 베풀지 않았다는 것이고, 내가 그에게 진 빚은 우리가 그토록 오래 사귀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여행을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다음 주일쯤은 그와 송도라도 놀러 가서 그의 들리지 않는 울음 소리라도 들어야 하겠다. [현대문학] 1973년 8월호 상호 데생 : 황동규 -루오의 광대 / 김현 ... 藝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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