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가 돌이 된 아주머니를 본다
풍경이 지루하고 짜증스레 멈춘 것을 본다
불그락 푸르락 한 영화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은 대구시지정 벽보판 앞에
꼼짝 않고 멈추어 선 아주머니
물컹한 보따리를 가슴에 안은 모습과
초록색 포대기에 고개 처박고 늘어지게 자는 아이가
거칠고도 사실적인 빈곤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모든 것이 불려 왔다
가로수와 부서진 벽돌담, 담배꽁초
그리고 멀리 보이는 앞산마저
이 벽보판이 호명해 온 듯하다
한번 불리어 온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태양도 벽보판 앞에 불려 와 움직이지 못한다
날카로운 바늘이 모든 이름의 등을 찌르고
채집상자 속의 곤충처럼
이 앞에 모아 놓았다. 여기서는 냄새가
난다 세계가 썩는 냄새가
끈질기고 집요하게 벽보판이 보여준다
엎드리고
벌려대고
배신, 고독, 욕정, 비련 같은 단어가
비스듬히 보인다 어쩌면 그런 비루한 낱말들이
우리를 이 지상에 묶어두는지도 알 수 없다

변두리 버스 정류소 앞에
낙타같이 서 있는 아주머니
등짝이 불룩하게 아이를 짊어진 아주머니
포대기에 묻힌 아이의 번질한 대머리는 추욱
뒤로 늘어지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사막인지
넓고 환하고 전갈 하나 보이지 않는다.
우유에서 지방분을 뺀 이 풍경은
생에서 공포가 제거된 짜증스런 세월을
보여준다 짧은 목을 세우고
수면의 껍질에 쌓인 아이가 깨어나 칭얼거릴 때
멀리 버스 오는 소리가 들린다. 어쩌면 버스 소리에
태아가 놀란 것도 같이, 아무것도 아직은
움직이지 않는다. 일순간, 그러나
아주머니의 어깨가 흔들리고
벽보로부터 등을 돌린 후 물찬 제비같이
버스에 올라버린다. 아지런거리는 먼지 맛이
텁텁하다 나는 훅 숨을
들여 마셨다 먼지가 가라앉을 때

그리고 어질해졌다.
움직인 것은 없다 모두에게
한순간 멈추고 움직이는 일이 당연한 것
풍경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벽보도 움직이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짜증스레 나는
살아 있다. 

            < 안 움직인다 > / 장정일

                                   ... 藝盤예반 *.*


 
Annie Haslam - Stil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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