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잘못 살아온 것이 아닌가 행여 뒤처진 것은 아닌가 후회하고 자학하는 순간에도 굴절 없이 성장한 패기만만한 젊은 학자가 단숨에 노스승의 학설을 뒤집기라도 하듯이 수천 수만의 잎새를 잘도 까불거리는 나무숲, 혹은 잠시도 부동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대열짓지 못해 야단맞는 학동들처럼 일정한 지표가 없는 숲속의 오솔길들
그처럼 명확하거나 사변적이지 않은 곳에, 아니 끝없이 논리를 배반하고 넘어서온 곳에서야 비로소 죽음은 제 크기만큼의 무게를 견디고 생은 결코 사고로써 측량할 수 없는 깊이와 사과나무 열매 같은 향과 맛을 알게 한다
그러기에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그 많은 저자들의 책과 책 사이로 난 빽빽한 회로들이 스스로가 들어섰다 겨우 빠져나온 미로의 흔적임을 모르고 자진하여 점점 헤어날 길 없는 행간 속으로 들어갔다
좀더 분명하고 강렬한 자극의 믿음과 이념을 원하며 걸신들린 아귀들처럼 절망과 슬픔을 대서할 손길을 기대하며 어쩌면 쓸모 없는 의미의 시체 더미들을 뒤적여왔다 제가 넘긴 책장의 수와 지식의 크기를 재며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관념은 이제껏 엄연한 현실의 하수인, 단지 단축될 수도, 늦출 수도 없는 모든 생의 행보를 너무 오랫동안 잊고 지내왔을 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최신 유행가를 흥얼거리듯 번역서를 고르고 까다로운 논쟁에 휘말리며 갑자기 눈먼 사람의 표정이 되어 제 발밑의 함정을, 아주 구체적인 사랑의 느낌들을 외면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