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나의 도서관을 상상한다
도서관이 아버지의 음주 습관을
영화 잡지를 뒤적이며 매캐한 사랑을 꿈꾸는 누이의 몽상을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르는 수세미 줄기의 습성을
바꾸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사소한 것들은 사소할 것이며
수세미는 때가 되면 꽃을 피울 것이다
그러니 도서관이 없다고 해도
세상을 세상이라고 부르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천 길 땅속의 미라처럼 매몰되어 있다가
도둑고양이처럼 떠돌던 집시 소년에 의해 발견된
전대미문의 그 도서관을 상상한다
30세에 접어들어 일신상의 많은 변화를 겪게 된 뒤
잔인한 햇빛 속을 걸어가다가
나는 도서관이 없었다면 내 침울함도
치유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서관의 지느러미들이 잘 있는가를 살펴봐 달라고 부탁한다
누군가 그것들을 노리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기억과 욕망이라는 서가를 천 개씩이나 가진 도서관
새의 발자국이라는 제목의 책
나무 그늘이라는 제목의 책
찰나의 그림자라는 제목의 책
나는 그 세 권의 책을 대출 받아야만 한다
나를 키운 것은 도서관이다
내 침울함을 치유한 것도 도서관이다
빗방울이 흰 종아리를 내보이며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는 아침에
나는 도서관으로 향한다

               < 도서관을 위하여 > / 장석주

  
                 
                                                       ... 藝盤예반 *.*                          
                                                    

Peter Gabriel - The Book of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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