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모와 수통은 우연히 만나, 조수 속 기우뚱거리며 쓸려내려간다, 굴 껍질 딱딱한 바위 기슭에 때로 휴전처럼 쉬며, 탄흔의 질린 표정을 굴 껍질 밑에 서로 숨기면서. 망가뜨려진 몸으로 갖는 그들의 휴식과 비탄은 공허하다, 전쟁도 그 이상의 평화도 수고의 값도 없이. 오직 쓸려갈 뿐, 차가운 동해의 깊이 속에 내던져진 채, 끊임없이 밑바닥으로만 내려가면서. 몇 마리 광어 새끼들 눈 비비며 철모 속에 숨어든다. 밤, 인광의 흰 소금물 속에서 문득 철모의 한 끝이 떨어져 나간다, 붉은 녹의 껍질로만 사라져간 어둠 속만이 아프다. 광어 새끼들의 잠 속으로 몇 개의 불덩이가 지나갔다. 불덩이 쪽으로 열린 광어 새끼들의 꿈을 향해 수통은 막연히 속이 출렁거림을 느낀다. 죽음과 함께 병사의 목줄기를 타고 넘어가 버렸던 물. 광어 새끼들의 잠 깬 눈을 숨기는 바위 기슭, 수통의 헤진 구멍 틈으로 몇 방울 물이 고즈너기 흘러내렸다, 전쟁도 그 이상의 평화도 갈증도 남김 없이 오직 쓸려갈 뿐인 거대한 소금의 밑바닥에서. < 철모와 수통 > / 이하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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