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녘부터 눈여겨 보았는데
웬일일까?
저 집엔 불이 켜지지 않네.
귀를 쫑긋 세워도
웃음 소리 하나
발자국 소리 하나
잡을 수 없네.

웬일인지 모르지만

한적한 뜰을 보면
나는 들어가
서성이고 싶어라.
빈 부엌 아궁이에 남비를 얹고 싶고
쓸쓸한 의자의
먼지라도 쓸고 싶어라.
나는 모든 빈 집에
내 손을 태우고 싶어라.
빈 마루에 길게 누워
마룻장과 길낄거리고 싶고
지나간 달력을 떼어주고 싶어라.
잠든 고양이를 깨우고 싶어라.
달빛에 흠뻑 젖은
마당에
꽃씨라도 뿌리고 싶어라.

웬일인지 모르지만

한적한 뜰을 보면
나는 들어가
서성이고 싶어라.


      < 도둑일기    

                                                         / 황인숙            
 
                                                       ... 藝盤예반 *.*              
 


Undertale OST: Empty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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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시간은 얼마일까.
아프지 않고
마음 졸이지도 않고
슬프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온다던 소식 오지 않고 고지서만 쌓이는 날
배고픈 우체통이
온종일 입 벌리고 빨갛게 서 있는 날
길에 나가 벌 받는 사람처럼 그대를 기다리네.
미워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외롭지 않고 지치지 않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까닭 없이 자꾸자꾸 눈물만 흐르는 밤
길에 서서 하염없이 하늘만 쳐다보네.
걸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따뜻한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 김재진            
 
                                                       ... 藝盤예반 *.*              
 


길은정 - 우울한 샹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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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세월이 한 곳으로만 몰려가는 법도 있구나
유난히 녹이 많이 슨 함석지붕에 앉아
늦가을 들판을 본다
어느 먼 옛날에 한 목수가 지붕을 못질할 때
못질한 부분의 상처가 이렇게 덧날 줄 알았을까
밤이 되면서 이 상처 속으로 별들이 들어가고
가끔 빗물이 스며들어, 이윽고
사람 떠난 구들장 위엔 꽃들이
조그만 얼굴을 내민다 .


   < 녹슨 지붕에 앉아 빗소리 듣는다

                                                     / 김창균       
 
                                                       ... 藝盤예반 *.*              
 


The Gentle Rain · Astrud Gilber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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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은 번번이 파도를 놓친다
외롭고 고달픈,
저 유구한 천년만년의 고독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철썩철썩 매번 와서는 따귀나
안기고 가는 몰인정한 사랑아
희망을 놓쳐도
바보같이 바보같이 벼랑은
눈부신 고집 꺾지 않는다
마침내 시간은 그를 녹여
바다가 되게 하리라


   < 벼랑 

                                                     / 이재무       
 
                                                       ... 藝盤예반 *.*              
 


The Fool on The Hill / Lucas Santtana & Flore Benguigui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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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지 일년 만에 그는 발견되었다 죽음을 떠난 흰 뼈들은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
고 무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독극물이 들어 있던 빈 병에는 바람이 울었다 싸이

렌을 울리며 달려온 경찰차가 사내의 유골을 에워싸고 마지막 울음과 비틀어진 웃음을
분리하지 않고 수거했다 비닐봉투 속에 들어간 증거들은 무뇌아처럼 웃었다 접근금지
를 알리는 노란 테이프 안에는 그의 단단한 뼈들이 힘센 자석처럼 오물거리는 벌레들을
잔뜩 붙여놓고 굳게 침묵하고 있었다

     < 단단한 뼈 >   

                                                         / 이영옥           
 
                                                       ... 藝盤예반 *.*              
 


Dust in the Wind (From 'Queen of the Ring - Music From The Motion Picture') · Corey Taylor · Bad Omens · Aaron Gilhu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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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이 반쯤 꺾이면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기리던 마음 모처럼 북쪽을 향해 서고
열린 시간 위에 우리들 一家는 선다

음력 구월 모일, 어느 땅 밑을 드나들던 바람

조금 열어둔 문으로 아버지 들어서신다
산 것과 죽은 것이 뒤섞이면 이리 고운 향이 날까
그 향에 술잔을 돌리며 나는 또
맑은 것만큼 시린 것이 있겠는가 생각한다

어머니, 메 곁에 저분 매만지다 밀린 듯 일어나

탕을 갈아 오신다 촛불이 휜다 툭, 툭 튀기 시작한다
나는 아이들을 불러모은다 삼색나물처럼 붙어 다니는
아이들 말석에 세운다. 유리창에 코 박고 들어가자
있다가자 들리는 선친의 순한 이웃들

한쪽 무릎 세우고 편히 앉아 계시나 멀리 山도 편하다

향이 반쯤 꺾이면 우리들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엎드려 눈감으면 몸에 꼭 맞는 이 낮고 포근한,

곁!



     < 즐거운 제사   

                                                         / 박지웅           
 
                                                       ... 藝盤예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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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바리게이트는
전경과 시위대 사이에 있었다, 지금 그것은
황량한 광장과 붐비는 도서관 사이에,
피켓 구호대와 냉소하는 군중 사이에,
한물간 금서(禁書)와 반질반질한 토익서적 사이에,
외로운 대자보와 주목받는 구인광고 사이에,
있다, 한때는 누구에게나 보였으나 지금
어느 눈뜬 이에게도 보이지 않는, 있는지 없는지
알 수조차 없는.

오랜만에 학교를 들른 어느 선배는

사라진 담쟁이가, 들리지 않는 통기타 소리가,
생존게임에 목 매인 젊음들이, 무기노릇을 못하는
낙엽이, 대화 없는 술자리가, 정치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다무는 후배들이, 네온사인 아래의 토사물이
그저 두렵다 했다, 내가 알던 그 선배는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는 건 나만의
헛된 기대였으리, 선배, 제발 솔직해지세요
그래, 솔직해지지, 사실은 세상이 두려운 거야,
바뀐 지 오래된 세상에 여전히 바뀌지 않는 내가
두려운 거야, 서른이 되어도 철들지 못한.

내년이면, 지긋지긋한 이곳과

'굿'바이는 못해도 '바이'바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만약 다시 신입생으로 돌아간다면, 만약 다시
어려진다면, 부질없이 마신 술을 모두 토해내리라
잔디밭에 널린, 엎드린, 찌부러진 꽁초며 병마개를
하나씩, 하나씩 주워보리라, 책보다 사람을
더 자주 보리라, 자유를 사랑한다고 말하기 전에
내게 프로포즈하는 숱한 자유의 정체를
다시 한번 캐내 보리라, 만약 다시, 만약,
'만약'이 혀끝을 맴돌 만큼 헛되었던가, 나는


      < 대학로에서   

                                                         / 양재숙           
 
                                                       ... 藝盤예반 *.*              
 


Crosby Stills & Nash : Wasted On The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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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자욱한 오솔길의 길목에 서고
싶을 때가 있다
쏟아진 함박눈에 주위의 사물이 몽땅 묻히면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새삼 궁금해지듯
안개 속에서 걸어나오는 사람이 누구이든
그를 반기고 인사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지만 그런 일들이 결국
무가치하고 후회스런 일로만 남기도 한다
어차피 우리네 삶이란 게
그런 것일 지도 모른다

안개 낀 오솔길에 서서

사람들의 얼굴에 그려지는 슬픔과 노여움을
설령 기쁨일지라도
바라보기엔 마음이 혼탁하고 심란하지 않도록
그저 기억의 저편처럼 초연하게
안개 속에서
잔잔한 마음과 나직한 음성으로
서로를 느끼고 싶다

평소 잘 아는 오솔길일지라도

짙은 안개에 쌓일 땐 그 속에서
새로운 무엇이 생겨 신비스런 형상으로
나타날 것만 같다...


      < 안개  

                                                         / 안재동           
 
                                                       ... 藝盤예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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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그런 날 있지.
나뭇잎이 흔들리고
눈 속으로 단풍잎이 우수수 쏟아져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 그런 날 말이지.
은행나무 아래 서서
은행잎보다 더 노랗게 물들고 있는
아이들의 머리카락 생각 없이 바라보며
꽁무니에 매달려 바람처럼 사라지는
폭주족의 소음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그런 날 말이지.
신발을 벗어들고 모래알 털어내며
두고 온 바다를 편지처럼 다시 읽는
지나간 여름 같은 그런 날 말이지.
쌓이는 은행잎 위로 또 은행잎 쌓이고
이제는 다 잊었다 생각하던
상처니 눈물이니 그런 것들이
종이 위로 번져가는 물방울처럼
소리 없이 밀고 오는 그런 날 말이지.


      < 편지 쓰고 싶은 날 >  

                                                         / 김재진           
 
                                                       ... 藝盤예반 *.*              
 


So many things · Jan Wer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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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
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솜
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
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

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그
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

은 슬픈 女子.


   < 한 잎의 여자 >  

                                                         / 오규원           
 
                                                       ... 藝盤예반 *.*              
 


Woman in the Wings · Maddy Pr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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